열대학

천경자 그림 <그림 8-1>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콩고의 천경자

천경자는 콩고에 한없이 매력을 느꼈고 콩고를 “아프리카 중의 아프리카”라고 불렀다. 콩고의 수도 킨샤사에서 천경자는 무엇을 보았을까?

모든 것이 태양에 닿은 듯한 빛깔의 배경에 선명한 배추색과 주황색이 광기마저 서리는 콩고 킨샤사. 한 가닥의 미소도 되던질 줄 모르는 거센 성품의 흑인들은 야만적이고 원시적이어서 문명인의 때가 덜묻은 듯 느껴진다. 그래서 더욱 아프리카 중의 아프리카 콩고는 원색의 매력이 넘친다.

팅가팅가

팅가팅가

팅가팅가는 탄자니아 옛 수도인 다르에스살렘에 기반을 두었던 에드워드 사이드 팅가팅가(Edward Said Tingatinga)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미술 화풍을 일컫는다. 팅가팅가 미술이 전통적으로 동아프리카에서 유래되었는지 아니면 콩고민주공화국을 통해 서아프리카에서 유입되었는지에 대해 아직 논쟁중이다. 다르에스살렘의 미술가들은 ‘팅가팅가 협동조합’을 결성해서 미술 작업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웹사이트를 만들어 전 세계의 미술가들과 소통하고있다.
https://www.tingatingaart.com/

김찬삼과 슈바이처

타이티 섬의 김찬삼

10권으로 된 《김찬삼의 세계여행》을 쓴 김찬삼은 한국에서 보릿고개를 넘기도 힘들었던 시기에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남태평양을 제 집 드나들 듯이 여행했다.

서구의 역사가 이미 끝났다는 것을 느끼고 쇼오펜하우에르는 인도철학에서 새로운 세계를 찾고, 쉬바이쩌는 아프리카 사람들에 대한 속죄를 위하여 유럽을 떠났고... 고갱도 이 때 서구를 등지고 이 타이티 섬에서 평생 지낸 것이 아닌가. 이런 역사의식을 지녔던 고갱을 받들었기 때문에 이 타이티 섬에 와서 느낀 감회는 그지없이 컸다.

한국 열대의학의 선구자 주인호

해방 이후 미군정의 도움으로 10명의 한국인 의사들이 록펠러 장학금을 받아 미국의 존스홉킨스, 미시건, 하버드 보건대학원에서 공부를 하였다.
그 중의 한 명이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공부한 주인호이다.
그는 1970년대 초에 아프리카에서 황열 방역 책임자로 헌신하면서, 전쟁과 열대 질병 사이의 깊은 상관성을 예리하게 꿰뚫어보았다.

황열 대유행의 감염경로는 다음과 같았다. 즉 나이지리아 병사들이 비아프라(Biafra) 정글 속에 포격을 퍼붓게 되자, 이에 놀란 원숭이들이 인가 근처로 도망쳐 나와 농가 주위의 바나나, 가사바나무 속에서 서식하는 모기 즉, Aedes africanus, Aedes simpsoni, Aedes egypti 種에 의해 원숭이 황열 -> 모기 -> 사람으로 전파되었으며, 국경 왕래가 자유로운 아프리카 신생국들에게 한 나라 안의 전염병이 곧 인접국가에 옮아간 것이었다.

주인호는 열대의학의 지평을 넘어 당시 아프리카의 새로운 사상운동인 ‘네그리튀드’(Négritude)에 대해서도 주목했다.

아프리카 대륙이 낳은 저명한 시인이며 사상가인 세네갈의 레오뽈드 센골 (Léopold Sédar Senghor) 대통령이 부르짖은 소위 네그리튜드는 넓게 또한 깊이 인식되어야 한다.
그가 주장하고 있는 네그리튜드란 동서양사상에 비견할 수 있는 흑인 독자적인 인식과 사고력에 의한 흑인문화의 본질을 뜻한다.

그림 4-2. 조셉 뱅크스

조셉 뱅크스

뱅크스는 영국이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가장 오래된 학회인 왕립학회(1662) - 물리학자 뉴턴이 12대 학회장이다 - 에서 가장 오랫동안 학회장(1778-1820)을 맡은 인물이다. 그는 인도와 동남아시아에 대한 영국 제국주의의 물질적 토대가 되었던 동인도회사의 총재였으며, 영국이 주도했던 열대 식물원 네트워크의 허브였던 큐식물원 원장을 죽을 때까지 맡았다. 또한 아프리카 식민화의 첨병 역할을 맡았던 아프리카협회(African Association)의 설립을 주도했다.

그림 5-5. 타이티 풍경

열대의 풍경과 낭만주의

18세기 후반 유럽 나라들 사이에서 경쟁적으로 이루어졌던 남태평양 탐험은 열대 자연사에 대한 낭만주의적 상상력을 촉발시켰다. 제임스 쿡의 2차 탐험에 참가했던 윈리엄 호지스(William Hodges)는 이런 흐름을 주도했다. 그는 열대의 빛, 기후, 산, 식물, 강, 대지를 포함하여 타이티 원주민의 피부조차도 타이티 특유의 색으로 묘사했다.

그림 5-8. 테 나베 나베 페누아

예술의 낙원을 찾아서

20세기의 위대한 예술사가 곰브리치(Ernst Hans Josef Gombrich)의 말대로, "고갱은 원주민의 정신 속에 들어가 그들이 보는 것과 같은 방식을 사물로 보려고 노력했다. 그는 자신이 묘사한 원주민들의 초상을 토착 장인(匠人)의 '야만적'인 미술과 조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렇기에 그는 형태의 윤곽을 단순화하고 강렬한 색채를 화면에 거침없이 구사했다."

그림 5-14. 뱀을 부리는 여자 마술사

카리브 해의 꿈

근대 서양미술사에서 흑인이 주인공인 작품은 극히 드물다. 이 흑인 여성 마술사는 보름달이 떠 있는 한 밤에 뱀을 통해 열대의 식물과 동물들에게 주문을 건다. 카리브해의 노예 주술사는 플랜테이션에서 고통스럽게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노예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한다. 노예들은 '아이티혁명'의 전설적 인물인 마캉달을 흉내내면서 주술을 통해 치유의 신통력을 발휘하는 여성 마술사들을 믿었다. 그들은 마캉달에 관해 전해져오는 마술적 음악을 피리를 통해 들려주었다.

오세아니아의 기억

오세아니아의 기억

'색채의 화가' 앙리 마티스는 1930년에 타이티를 다녀왔다. 약 15년 후에, 그는 '종이 오려 붙이기'(cut-outs)라는 새로운 기법을 통해 폴리네이사의 열대 자연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내었다. 지중해 연안에서 작업을 해왔던 그는 '지중해 : 폴리네이사 = 서구 문명 : 열대 원시미술'의 미학적 세계관을 견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