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우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만나고 있다. 이는 문화적으로 융합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그림은 열대와 서구 사이의 문화융합에도 해당한다.

축복받은 그라만 콰시
1690년에 아프리카 기니(Guinea)에서 태어난 콰시는 1700년경에 네덜란드 식민지인 수리남(Suriname)에 노예로 끌려왔다. 그는 진통을 완화시키고 소화를 촉진시키는 어떤 약초를 발견했다.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소유주가 이 약초의 뛰어난 약리적 효과를 알아차렸다. 그는 칼 린네에게 이 사실을 편지로 알렸다. 린네는 이 약초의 학명을 ‘콰시 아마라’(Quassi amara)라고 붙여 주었다. 이런 사실이 유럽의 아메리카 식민주의자들 사이에 널리 퍼지면서 콰시 약초는 수리남의 최대 무역 상품으로 부각되었다.

노예선
세네갈 유역에서 나는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깜둥이 육백 명을 사들였는데
딴딴한 근육과 건장한 다리가
꼭 질 좋은 주물로 만든 쇳덩이 같거든
그 놈들을 손에 넣는라 내가 지불한 것은
화주와 유리구슬과 철구였으니까
반수만 놈들이 살아 남는다 해도
순이익이 팔백 퍼센트는 될 거야
우리가 리우데자네이로에 도착해서
3백명의 깜둥이만 살아준다면
곤잘레스 페이로 상사는
두당 일백 두카트는 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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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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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든 인간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그리스도여!
저 3백 개의 상품이 살아남지 않으면
내 장사는 망쳐버리고 맙니다.

아프리카와 아메리카가 지탱해주는 유럽
18세기에 커피, 설탕, 차 등이 유럽에서 일상적으로 소비되면서 [열대] 식민지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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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 생산품들이 없었더라면 서구가 과연 오늘날과 같이 될 수 있었겠는가?

마이 초상화
제임스 쿡의 남태평양 항해 때 통역을 맡았던 라이아테아(Ra’iatea) 섬 출신의 마이(Ma‘i) - 영국에는 오마이(Omai)로 잘못 알려졌다 - 가 1774년에 런던에 도착했다. 왕립예술원 초대 회장으로서 유럽 미술계에 큰 영향력을 끼쳤던 레이놀즈(Joshua Reynolds)는 마이의 초상화를 그렸다.